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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사례

장생탄광 수몰사고에 관하여 일본법실무연구회에서 발표 [법무법인 시우 부산 이용민 변호사]

장생탄광 수몰사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일본법실무연구회 회장 이용민 변호사

 

1. 사건 개요 및 배경


일제강점기인 1942년 2월 3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 해저에 있던 장생탄광 갱도에서 붕괴와 함께 해수가 급격히 유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지하 30미터 깊이의 갱도에서 작업 중이던 광부 183명이 순식간에 밀려든 바닷물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중 136명(약 74%)이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였고, 나머지 47명은 일본인 등이었다. 이 탄광은 해저 바로 아래까지 무리하게 파 내려간 위험한 갱도로, 해수 유입을 막기 위한 암반 두께가 법정 기준인 40m보다 훨씬 얇은 30m 미만에 불과했고, 곳에 따라 7m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사고 이전부터 누수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인 노동자들도 기피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이었다. 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많은 조선인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동원되었고, 실제 탄광 노동자의 70~80%가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결국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석탄 증산을 무리하게 추진하던 중 수압을 이기지 못한 갱도 천장이 무너져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사고 현장인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 앞바다에는 당시 탄광 갱도에 공기와 물을 공급하던 환기구 겸 배수구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수면 위로 남아 있다. 사고 이후 갱도 입구는 봉쇄되어 지금까지 희생자들의 유해가 갱도 깊숙이 방치된 상태다.

 

2.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 및 대응


사고 당시 일본 당국은 공식 조사를 실시하거나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2차 재해 방지”를 명분으로 갱도 입구를 급히 막았고, 시신 수습 노력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개전 직후라는 시기적 상황 때문에 관련 보도나 기록은 통제되었고, 사회적으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국내 두 번째 규모의 광산 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시 체제하 정보 은폐로 인해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전후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2005년 강제노역 피해자 유골 송환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적은 있으나, 실질적 진전 없이 중단되었다. 2023년 국회에서 처음으로 유해 반환 문제가 공론화되었고, 질문주요서가 제출되었으나, 정부의 공식 답변은 여전히 소극적이었다.2024년 일본 후생노동대신은 “유골 위치 특정이 어렵고 안전도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부가 직접 현지 조사를 하거나 민간 조사에 협력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시민단체는 유감을 표명하며, 활동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3. 사고 관련 일본 기업의 책임 인식과 대응

 

장생탄광은 사고 당시 민간업자가 운영하던 곳으로, 사고 직전 개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상태였다. 사고 이후 회사는 곧 해산되었고, 유해 수습이나 유족 지원에 나섰다는 기록도 없다. 조선인 유족은 사고 사실조차 전달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전후 이 탄광은 폐광되었고, 관련 기업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현재까지도 해당 기업이나 연관 대기업이 책임을 인정하거나 보상에 나선 적은 없다. 시민사회는 윤리적 책임이라도 통감하고 유해 발굴과 추모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공식 입장 표명은 없는 상황이다.

 

4. 일본 내 시민단체들의 활동 및 피해자 추모·진상 규명 노력

 

1976년 지역 사학자의 논문 발표를 계기로 이 사고는 처음 학계에 소개되었다. 이후 1991년 ‘장생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결성되어 희생자 명단을 토대로 유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활동을 펼쳤다. 이로 인해 1992년 한국 유족회가 결성되었고, 한일 유족 간 교류가 시작되었다.
2013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이후 매년 2월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2024년에는 갱도 입구가 발견되고 민간 잠수부들이 수중 탐사에 착수했다. 수색은 민간 모금과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본 시민들은 “죄값을 치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5. 일본 언론의 보도 양상

 

사고 당시 언론 보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고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통제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잊힌 참사로 남아 있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 지역 언론과 NHK 지방국이 조금씩 다루기 시작했다.
2017년 이후에는 사고 75주년, 80주년을 계기로 보도가 늘었고, 2023년 로이터 통신 보도 이후 국내외 언론이 이를 조명하였다. 특히 2025년 83주기 추모식은 NHK 등 주요 매체가 집중 보도하였고, 한국 정부 대표단이 처음 참석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6. 역사 인식과 관련한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태도

 

일본 사회는 오랫동안 이 사건에 무관심하거나 모르고 있었다. 일부 지역 사회와 진보적 지식인을 중심으로만 기억되어왔다. 최근 들어 일부 시민층이 반성적 시각에서 과거사를 직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청년 세대의 참여도 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미 오래된 일”로 치부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도 있다. 정부의 소극적 대응은 사회의 무관심을 반영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 사회 내부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며 정부와 사회의 책임을 성찰하는 목소리도 함께 존재한다.

 

7. 한일 관계 속 사건의 의미와 향후 협력 전망


장생탄광 수몰사고는 한일 역사 갈등의 상징 중 하나다. 유해가 아직까지 바닷속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일 관계의 그늘을 보여준다. 최근 한일 관계 개선 흐름 속에서 유족들은 양국 정부에 공동 해결을 호소하고 있다. 유해 발굴과 송환을 위해서는 일본 정부의 기술적 지원과 한일 간 공조가 필수적이다. 2025년에는 한국 정부 대표가 추모식에 처음 참석했고, 한국 국회도 유해봉환 촉구 결의안을 준비 중이다. 한일 공동조사단 구성, 역할 분담, 공동추모식 등의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자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인 만큼, 양국이 협력해 이 사건을 해결한다면 과거사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