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란한 기분으로 논산행 버스에 올랐다. 세상과 2년간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했던 것 같다. 버스에 있던 4시간 동안 부모님은 뭔가 많이 먹이려고 계속해서 먹을 것을 권하셨지만 아침에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긴장해서 그런지 입도 대지 못했다.
4시간이 금방 지나고, 논산에 도착했다. 나와 같이 입영하게 될 젊은이들로 넓지 않은 정류장은 곧 가득 찼다. 정류장 옆에 있는 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었는데 속이 너무 좋지 않아서 그것마저 몇 수저 들지 못했다. 사회에서의 마지막이 될 점심식사를 하고, 입소대 쪽으로 향했다. 앞에서 장사꾼들이 볼펜, 군인지갑등을 팔고 있었으나 별로 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군 생활 2년동안 액자에 넣어 놓았던 사진을 입소대 입구에서 찍었다. 입소대 입구 안으로 걸어들어간지 약 10여분 후, 아랫쪽에 넓은 연병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쪽에는 일반병, 다른 한쪽에는 기술모병이라는 팻말이 붙여져 있었다. 카투사는 기술모병이라고 하여 기술모병 팻말이 있는 곳에 섰다. 다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연병장엔 수많은 입소장병들이 아무런 규칙없이 서 있었고 반대편 높은 스탠드 쪽에는 곧 입대할 젊은이들의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소대대장의 연설이 시작되었고, 자제분들은 건강하게 제대할 것이니 전혀 걱정 말라는 내용의 연설 후 마지막으로 가지고 오면 안되는 물품을 소지한 사람은 부모님께 돌려주라는 말에 사실 반납해야 할 물품은 없었지만, 인사할 마지막 기회인 줄 알고 부모님께 달려가서 큰절을 하고 돌아섰다. 그때 맺힌 부모님의 눈물과 나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을 보고 놀랐다. 이전까지는 부모님 앞에서 한번도 눈물 보인 적이 없었는데.. 입대행사가 끝난 후 분대장의 인솔로 입대장병들이 줄지어 퇴장하자 그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던 다른 부모님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곧바로 교관들이 훈련병들을 이끌고 막사 쪽으로 향했다. 막사 쪽으로 거의 다 도착하자 욕과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만큼 심한 욕을 하진 않았지만, 바로 그때 내가 군대에 왔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교관들은 인원체크 및 건강체크를 한 뒤, 훈련병들을 막사로 집어넣었다. 막사는 생각보다 좁았다. 말로만 듣던 내무실이라는 곳. 누운 상태에서 발끝만 움직이면 옆 동료랑 부딪칠 정도로 내무실은 좁았다. 다들 첫날은 잠이 잘 오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나는 오기 전날 긴장해서 잠을 한두시간 밖에 못자서 그런지 금새 곯아떨어졌다.
입소대에서 한 일은, 앞으로의 군생활에 필요한 군복, 군화 및 생필품 등의 물품을 지급받고, 청소하거나, 밥먹고, 불침번서고, 낙엽쓸고, 자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이외의 시간은 각잡고 앉아있는다. 얼마나 시간이 안가고 지루하던지 논산훈련소로 빨리 이동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후에 생각해 보면 무언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시간이 많았던 입소대 생활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입소대 생활 동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입소대에서의 6일 혹은 7일인가가 지난 다음에, 논산훈련소로 이동했다. 논산훈련소 입소 후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논산에서의 나의 번호는 157번이었다. 훈련소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번호로 불렸다. 조교가 부르면 157번 훈련병 이용민! 이라고 외쳐야 했다. 처음에는 기합을 잡으려고 그러는지 얼차려를 많이 받았다. 나름대로 빠릿빠릿하게 할려고 조심했는데도 단체체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40명이 넘는 소대원중에 누구라도 실수를 하면 단체로 얼차려를 받는 일이 흔했다. 엎드려 뻗쳐, 팔굽혀 펴기, 오리걸음, 고등학교 졸업 실로 오래간만에 하는 것들이었다. 또한 첫주에 배식조를 맡게 되었는데, 이것이 정말 고역이었다. 배식조를 하는 기간은 아침에 눈 뜨고 나서 수면시간 될때까지 쉬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바쁘다. 배식조때는 잔반을 맡았는데 장병들이 먹고 나서 남은 잔반을 모아서 버리는 일이었는데 다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별로 남기지는 않았는데도 워낙 군인들의 수가 많아서 잔반의 양이 엄청났다. 하루에 두시간 이상씩 잔반통을 처리한 덕분에 군복에 잔반 냄새가 배어서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다. 논산에서의 식사는 사실 나름대로 맛있었다. 분대장들이 너무 시간을 적게 줘서 항상 다 먹을수 없었다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인간은 환경에 적응을 한다는 그 누군가의 말처럼, 2-3주가 지난 후부터는 그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여유롭게 또한 배부르게 먹을수 있게 되었다. 요즘도 그때의 경험 덕분인지 식사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이 생겼다. 군대음식 중에서 기억나는 메뉴가 있다면 단연 일요일에 나오는 햄버거를 꼽을 수 있다. 군대오기전에 오인용이라는 플래쉬 애니메이터 팀에서 만든 플래쉬 작품을 본적이 있는다. 거기 보면 속칭 군대리아라는 군대에서 지급하는 햄버거 패티에는 닭머리도 들어있고 별게 다 들어있다던데, 여기서 먹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정말 닭머리가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맛있었다. 오히려 미군부대에서 나왔던 햄버거보다 훨씬 맛있는 것 같다. 지금도 먹을수 있다면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을 정도로.. 일요일에는 종교행사를 가는데 사실 나는 무교였지만, 종교를 선택하지 않으면 종교행사 시간동안 잡역을 시킨다는 소문이 있고 또한 일요일에 가만히 있기는 싫어서 성당을 선택했다. 성당에서는 빵과 콜라를 줘서 좋았다(단순하긴^^;...) 어렸을적에 교회다녔을때 이후 간만에 기도를 했다. 힘든 곳에 오게 되니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조그만 것 하나 하나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다. 시원한 물 한 모금, 5분 휴식의 기쁨, 화장실을 갈수 있는 제한된 시간. 사회에서 고립된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지라 사회에서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그리웠다. 그 중에서도 그때는 꽤나 추웠는데도 시원한 맥주 한잔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논산에서는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빨래에, 식사준비에,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 사회에서는 어머니가 도와 주시던 것들을 모두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일과시간 이후(22:00) 밤에는 거의 매일 한시간씩 불침번을 섰다. 거의 4일에 3일정도 섰으니 30시간 정도 했나? 그 30시간동안 정말 많은 걸 생각했다. 자대가면 뭐할지, 제대하면 뭐할지, 사회에서 있었던 추억들을 생각했다. 훗날 자대 배치 받은 뒤에 공부했던 토익이나 일본어능력시험과 같은 것들도 그때 계획한 내용의 일부였다. 논산에서 가장 기다리지는 것은, 연인들과 친구들의 편지다. 사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매일 10통 가까이 받는 친구들도 있었고 한 두통 못 받는 친구들도 있었다. 자기 전, 혹은 다들 잘때 몰래 화장실에서 읽는 편지가 얼마나 재미있고 좋았었던지, 받은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몇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화생방, 주간, 야간 행군, 숙영등 주요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주간행군은, 단독군장을 하고 20km정도를 걷는 훈련인데, 군장을 매지 않아서 그런지 별로 힘들지 않았다. 훈련 직전에 포카리 스웨트와 핫 브레이크를 주는데, 학교 다닐때 아침 안 먹고 대용으로 매일 먹던 그것이 이곳에서는 꿀맛이었다. 주간행군은 별 것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방심했는데 잘못 걸어서 발에 물집이 잡혀 버렸다. 그때부터 1주일간 발바닥이 따가워서 걸을 때와 아침에 구보할 때 꽤나 고생했다. 화생방 훈련은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가스실 안에서 방독면을 벗었을때 그 눈, 코, 입에서 나오는 액체는 과연 내 몸에서 나온 것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 느낌은… 그런 경험은 없지만 대략 화약이 얼굴에서 터지면 그런 느낌이 들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내게 가장 힘들었던 훈련을 꼽으라면 숙영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깨가 약해서 무거운 군장을 매고 장시간 이동하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다. 숙영지까지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길은 너무 힘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깨를 끊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날 밤 보일듯 보일 듯 하면서도 보이지 않던 논산훈련소의 정문은 아직까지도 눈에 생생하다… 야간행군은, 전날 옆에 있던 전우조인 재석이가 아파서 불침번을 재석이 것 까지 2시간 서주고 잠을 못자서 그런지 무거운 것도 그랬지만 걸으면서도 잠이 오는 것이 힘들었다. 숙영 이후에는 그렇게 힘든 훈련은 없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논산훈련소에서의 6주가 끝났다. 수료식 날 정말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떠나고 싶던 곳이었는데 떠날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는 녀석들도 있었다. 힘든 훈련을 함께 받아서 그런지, 다들 그리워질 것 같았다.
훈련소 근처에는 장병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역이 있다. 무궁화호에 논산훈련소를 수료한 신병들이 한가득 탔다. 내가 속했던 28연대의 연대장님이 와서 배웅을 했다. 논산에서 서울까지 수송병들이 군기를 잡긴 했지만 논산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사실이, 그리고 기차를 타고 간다는게 너무 좋았다. 나중에 자대배치를 받고 나서 휴가나 4데이 때마다 TMO를 너무 많이 타서 TMO가 지겨워지기도 했지만… 무궁화호 안에서 전투식량을 처음으로 먹었다. 햄볶음밥과 김치, 소세지 밥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군대음식이 체질인가? 일부는 소화가 안된다는 말에 반밖에 안 먹었지만, 나는 깨끗하게 먹어 치우고 말았다. 용산역에서 하차하여 의정부까지 지하철을 탔다. 더플백과 논산가방에 이병계급장을 단,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신병이었다. 그때는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잘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다. 6주만에 다시 본 사회는 얼마나 반갑던지.. 의정부에서 내리자 몇대의 버스가 카투사 훈련병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KTA로 이동할 것이라는 카투사 훈련병들의 기대와는 달리, 버스는 X0X보충대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약 3박 4일 정도 머무른 것 같다. 하루 약 9시간 정도 배식하고, 나머지 시간은 잡역 및 휴식, 잠으로 보낸 것 같다. X0X 보충대에서의 배식. 수천명의 입소장병들의 식사를 준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부식을 맡았는데, 그래도 다른 일들에 비하면 나은 일이었다. 뭐든지 수천개 단위였다. 우유를 수천개 나눠주고, 감을 그만큼 씻어서 나눠주고… 그래도 나눠주는 것만 끝나면 조금 쉴수 있었으니 배식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일해야 하는 잔반보다는 훨씬 편했다 X0X보충대에서의 생활은 논산보다는 훨씬 좋았다. 배식만 끝나고 나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PX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군대에서는 별로 돈을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곳 PX에서 쓰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짬밥을 배터지게 먹기보다, PX에서 사먹는 걸로 밥을 대신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마지막 날, 마지막 배식을 끝내는 사이 버스 네대가 도착했다. 검은 베레를 쓴 세사람이 내렸다. 말로만 듣던 카투사 교육대 교관들. 그때는 그곳 생활에 대한 알수 없는 두려움 보다, 언제 나도 저런 베레를 쓸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버스를 타자마자 카투사 교관은 군기를 잡았다. 그가 처음 한 말이 생각난다. “눈X 앞에 X박어!” 말대로 다들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덕분에 잭슨으로 가는 도중 풍경을 감상할 기회는 없었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CAMP JACKSON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처음 본 미군들, NBA에서나 볼만한 덩치 큰 흑인이었는데 첫 인상은 왠지 좋지 않았다. 내리자마자 물품 체크를 했다. 대부분 X0X에서 가져온 과자들을 압수당했다! 나는 칙촉 두 봉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나 압수당했다.(사실은 버려졌다.) 간단한 인프로세싱을 끝내고 배럭에 짐을 풀었다. KTA에서의 훈련은 잊지 못할 것 같다. SQUAD Leader를 했는데 분대원들이 다들 명석하고 착했기 때문에 편했던 것 같다. KTA에서는 비인격적인 대우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엄격했다. 훈련이라는 것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착하고 난 다음날 영어시험을 치르고 오후에는 피티 시험을 보았다. 영어시험은 체감상으로는 토익보다 훨씬 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처음 겪어보는 피티시험은 어려웠다. 대부분은 교육병들은 첫번째 피티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나도 물론이고… 수료전에 하는 2차 피티까지 떨어지면 자대가서 엄청난 갈굼을 당할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3구대 교관이 우리 상태가 심각했다고 생각했던지 건물 나갈때나 들어올때마다 푸샵 10회씩 하라고 했는데. 덕분에 하루에 약 200개씩 푸샵을 했던 것 같다. 처음 DFAC에 들어갔을때의 기분이란.. 패밀리 레스토랑을 본 기분이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인지 나중에는 질리게 되서 보기만 해도 싫었지만.. 디팩은 메인과 숏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메인은 일반 메뉴고 숏은 패스트푸드 음식을 주는 곳이다. 다양한 종류의 음료와, 샐러드 바, 타코 바, 디저트 등, 처음 보았을때 그곳은 천국이었다. 개인적으로 그곳에서 아침에만 먹을 수 있던 Spiral 후라이드가 그립다. 물론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빨리 먹으라고 난리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상병때 참가했던 교육인 PLDC(Primary Leadership Development Course)교육병들도 식사를 제한된 시간안에 해야 했기 때문이다. PLDC때도 빨리 먹느라 고생했다. 첫 일주일은 군사교육을 받고, 2주차에는 영어교육을 받았다. 군사교육때는 병공통과목, M16사용법, 미군 제식동작, 미군 계급제도, 지형, 독도법 등을 배웠다. 교관은 카투사 교관이 한명, 미군 교관이 둘이었는데 다들 유머스럽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카투사 교관은 미국에서 너무 오래 살다 와서 그런지 오히려 한국어가 어색했다. 친해지고 나서 밤에 교육병들의 연애편지 중 하나를 선택해서 한국어로 읽는데 어색한 발음으로 닭살스러운 표현들을 읽으니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카투사 교관은 한국어로 수업을 했지만 미군 교관이 교육할때는 영어로 대부분의 수업을 들었다. 사격이나 피티나 병공통 과목중 하나라도 합격하지 못하고 재시험을 보게 되면 자대가서 엄청난 갈굼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다들 열심히 했는데, 안타깝게도 난 사격은 통과하지 못했다.
3,2,1,4,5반순으로 상위반인데 나는 2반에 들어갔다. 영어교육시간에는 군사용어 일부를 배우고, 주로 생활영어를 배웠다. 하루종일 영어수업을 듣는데, 얼마나 잠이 오는지, 훈련이 힘든 것 보다 쏟아지는 잠을 참는 것이 고역이었다. 영어강사는 전직 미 해병대원이었는데 착한 할아버지였다. D&C(Drill and Ceremony)- 제식동작을 할 적에는 긴장이 됐는데, 왜냐하면 스쿼드 리더가 항상 제일 앞에서 구령에 맞추어 이동하기 때문에 실수를 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연습할 때는 몇번 실수를 했는데, 운좋게 시험때는 완벽하게 해냈다. 구대 운도 좋아 시험 보는 모든 종목에서 1위를 하여 우리 3구대는 Honor Platoon을 하게 되었다.
졸업식 며칠 전 아침, 기다리고 기다리던 부대 배치 시간이 왔다. 다들 용산을 바라는 눈치였다. 사실 나는 용산이 어떤 곳인지 몰라 부산이나 대구 왜관쪽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와잇맨 홀에 카투사 훈련병 모두가 모였다. 얼마 후 한국군 대위로 보이는 지원장교가 노트북과 디스켓을 가져왔다. 노트북을 켜고 프로그램을 수행하니, 뭔가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것 같은 프로그램이 하나 떴다. 컴퓨터 공학도인 내 입장에서 볼 때 뭔가 허술하게 생긴 것이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프로그램의 신뢰성(공정성)에 대해서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정말 공정하게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보여줄려면 프로그램을 3회 수행하여 3번째 결과를 선택한다고 가정할시, 수행시마다 결과 자료를 공개해야 할 것이다. 여러 인원이 1차 2차 3차 테스트에 모두 똑 같은 용산 의무병 보직이 나온다면 문제가 있을 것이다. 훈련병들에게 몇번째 돌릴 결과를 진짜 결과로 선택할 것인가 물어보았는데 선택된 훈련병은 그냥 첫번째로 하겠다고 했다. 프로그램을 돌렸다. 사실 나는 뒤쪽에 앉아서 내가 어디 배치되었는지 보지도 못했다.
프로그램 결과를 프린트 하여 교육병들에게 돌렸다. 나는 용산 XX의무사 본부중대 PC운용병이었다. 이게 맞는 건지 몇번이나 보았다. 용산에다가 내 전공에 맞는 컴퓨터 관련 보직까지, 당시에는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환성과 탄식이 와잇맨 홀을 가득 채웠다.
프로그램에서 뽑힌 대로 용산 XX의무사라는 곳에 배치받게 되었다. 용산이란 사실 때문에 배치받기 전 주변의 수많은 동료들에게 갈굼(?)을 받았다. 카투사들이 가는 곳에 있어서 용산이 가장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 중심지에 위치해 있고, 또한 부대 내의 시설도 한국 내 미군부대 중 가장 좋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카투사 중에서도 용투사라는 말도 있을까? 사실 입대하기전 카투사 종합정보라는 카페를 통해서 왠만한 정보는 다 알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입대하면 에어 어썰트, 피티 마스터, PLDC, EIB를 따는 슈퍼 카투사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사실 부대 배치받기 전에는 부산, 아니면 대구로 배치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배치받고 생활을 해 보니, 정말 내가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부산에 있었다면 해 보지 못했을 수많은 경험들을 해 보았으니 말이다.
정보관리참모부,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았는데.. 과연 어떤 일을 할까 궁금했는데, 혹시나 프로그래밍을 좀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하는 일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부대 내의 컴퓨터를 유지 보수 하는 일이었다. 아웃룩 셋업, 프린터 셋업, 프로그램 설치, 유저 아이디 관리, 업그레이드 등의 일을 했다. 사실 비전공자가 해도 별 문제가 없는 일들이었다.
도착하는 날 기억이 난다. KTA졸업식이 끝나고, 버스가 왔다. XX의무사에서 한명이 왔는데 그 사람은 우리 중대 사람은 아니고 제대가 얼마 안남은 XXX병원 병장이었다. 도착하자 부대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플백과 논산가방등, 짐을 한가득 들고 XX의무사 RSO에서 먼 배럭까지 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배럭으로 오는 도중, 한 선임이 드래곤 힐이란 부대내에 호텔을 보고 이곳이 우리가 머물 숙소라고 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내부는 특급호텔보다는 아무래도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화려하다. 보통 Farewell파티 등을 할 때 자주 가게 되는 곳이다. 30분 정로 걸었을까? 앞으로 1년간 생활하게 될 1X0X 배럭 CQ룸에 도착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마신 게토레이의 시원함은 논산에서 야간행군때 마신 포카리 스웨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첫날에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신병이 오는 날 밤은 항상 부대모임을 하는데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갈굼(?)도 많이 당하고, 그렇지만 다들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소개를 하고 장기자랑을 할 때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반응이 너무 썰렁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다들 5초정도 말이 없다가 어색한 박수를 쳤다.
자대 배치 받은 뒤에는 약 일주일 동안 박XX 이병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유머스럽고 친절한 좋은 사람이었다. 10일 정도 지나서 운좋게 1XX7쪽에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이병때는 특별히 일과시간에 해야 할 일은 없는데도 항상 잠이 부족했다. 신병기간에는 군화군복을 하는데만 최소 2시간 이상이 걸렸다. 군화가 아무리 닦아도 광이 나지 않아서 고생했다. 시간이 해결책인지 나중에는 20분만 닦아도 그럭저럭 괜찮을 정도로 광이 나게 되었지만.
내 방은 1인 1실이었다. 사병의 방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좋다.
부산에 있는 내 방보다도 좋고 가 보지 못했지만 소문으로는 한국군 간부의 방보다 좋다고 한다. 논산에서 약 50명의 인원이 하나의 큰 방에서 생활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곳은 천국이다. 개인 책상도 있고, 침대도 있고, TV스탠드며, 창고까지 있었다. 더구나 화장실과 부엌까지 있었다. 부엌에는 별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냉장고와 전자레인지까지 있다. 용산에서도 의무사 배럭은 좋기로 유명하다. 좋은 만큼 다른 부대
와는 달리 막사검열이 자주 있었다. Inspection이라고도 하는데, 방이 깨끗한가 아닌가를 검사하는 것이다. 내 NCOIC였던 유명한 Asshole인 SSG Holland가 인스펙션을 엄격하게 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깨끗한 곳에 손가락을 비벼서 때(자신의 때)를 만들어 먼지라고 우겨서 곤혹스럽게 만든다든지, 뭐 그런 소문들이 있었다.
내가 일하는 곳에 선임은 두명이 있었다. 서XX 병장과 박XX 병장. 나와 짬 차이가 너무 크게 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들어올 즈음에 한명은 제대 4개월 남겨두고 있었고 한명은 상병 말호봉이었으니 말이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박XX 병장은 나중에 모닝콜이나 술자리때 나를 고생시키기도 했지만, 제대 전에 정훈때 나한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했을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군생활 중에 훈련이라는 것을 빼먹을 수 없다. 대표적인 훈련은 RSO&I와 UFL가 있고 FTX라는 비정기적인 훈련이 있다. 이병이 거의 끝날 때쯤 RSO&I를 가게 되었다. 비밀취급인가를 가지고 있었지만, 경계설 인원이 부족한 관계로 경계를 서게 되었다. XX시간 교대였는데 야간에 XX시간동안 경계를 서게 되었다. IMO소속이라는 이유로 경계뿐만이 아니라 TOC안에서도 필요할때 호출되어 일했다. TOC안에서 한 일은 기밀이라서 말할 수 없다. 3월이었지만 무척 추웠다. 새벽 3시쯤 몽롱하게 게이트 가드를 서고 있는데 당시 중대장이 와서 “Are you alright?” 하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어보고 추운데 탈수증 생기면 안된다고 얼음장 같이 차가운 다이어트 콜라를 손에 쥐어주던 기억이 난다. 속옷과, 팔리프로, 깔깔이, 군복, 고어텍스까지 5겹으로 입었는데도 추웠을 정도였으니까… 훈련동안에 Ammo detail나가서 M9이라는 권총을 쏴보기도 했다. 권총사격이 훈련생활중에는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다. M16보다 훨씬 잘 맞는걸 보면(거기서 쏜 사람들 중 2위) 왠지 권총체질인 것 같다. 그렇게 열흘정도의 훈련이 끝났다. 훈련이 끝나는 그 느낌은 항상 좋았다. 훈련이 끝나자 부대 안도 벚꽃으로 만발했다.
내 룸메이트는 Brewer라는 녀석으로 인디애나에서 온 녀석이다. 게으르긴 하지만 룸메이트로서는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다. 나는 집과 학교가 부산이라 주말에 별로 나갈 일이 없어 일병때 같이 서울구경을 많이 다녔다. 남산타워며, 인사동, 덕수궁, 명동이며, 부산의 우리집까지 데리고 왔었다. 가정문제, 여자문제, 미래문제등 서로에 대해 어떻게 보면 너무 사적인 것까지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한번은 미국에 있던 부인이 바람을 피워서 난리가 나고 거의 우울증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같이 술도 많이 마시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부인이 바람을 폈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2004년 4월에 일병 계급장을 달았다. 돌이켜 보면 일병 기간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섹션 NCOIC및 골치덩어리 미군들과의 수많은 트러블, 3번의 SRP 대장정(오버워크의 극치였다), 불평등한 업무분담,섹션 후임들이 두명 들어오니 책임은 더욱 늘어나고 할일은 더욱 늘었다. 섹션에는 흑인파와, 백인파, 카투사파라는 세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물론 놀때는 따로 놀지만, 일할때는 힘을 모아서 같이 해야 하는데, 팀워크라고는 찾아볼수도 없었고 덕분에 말다툼도 많았다. 문제는 흑인파의 세력이 워낙 막강해서(섹션의 우두머리가 흑인이었다.) 백인들과 카투사가 눌려 지내야 하는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IMO의 업무가 용산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을 돌아다닐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구, 부산, 동두천, 의정부, 평택, 춘천, 원주, 왜관등등.. 전국의 미군부대를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2004년 12월의 TDY(영외근무)를 잊을 수 없다. 부산의 호텔에서 1주일간, 대구의 호텔에서 1주일간 머무르면서 일을 했다. 부산에서 일하다 보니 업무를 마치고 친구들을 볼수도 있었다(물론 시험기간이라 그리 반기지는 않았지만^^;). 숙박비만 해도 정말 비쌌다. 마지막엔 써전 로가 휴가를 가버리는 바람에 팀을 내가 차지할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생활하는 동안에는 부대 내에서 영화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사실, 영화를 좋아했긴 했지만 입대 전에는 자주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부대에는 매일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영하다 보니, 할일이 없는 날이면 꼭 가서 영화를 보곤 했다. 자막이 없다는게 좋기도 하고 어려운 영화일 때는 나쁘기도 했지만, 공짜로 최신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영화관에서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한미 양국의 애국가가 나오는 것이 인상적이다.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모두가 일어나서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는다. 거기서 본 서른편 정도의 영화중에 지금 기억나는 것이라면 Butterfly effect와 love actually정도?
2004년 가을부터 Virtues Program이라는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다. 미군과 카투사가 한조가 되어서 초등학교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5학년들은 귀여웠고, 6학년들은 짬을 좀 먹었다고 그러는지 수업분위기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한 term이 끝날 때는 언제나 보람을 느꼈다. 크리스마스때도 아이들에게 수십통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다. 비록 나중에 선생님이 쓰라고 해서 시킨 것을 알긴 했지만^^;;.. 서울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교육부장관과 주한미군 사령관 주최 런천에 참가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간만에 정장을 한껏 빼입고, 안병영 교육부장관과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과 악수를 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라포트 장군은 Thank you for your support라는 말을 했다..
주한미군 사령관과 함께
상병 5호봉 때였던 2005년 2월에는 PLDC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PLDC는 Primary Leadership Development Course의 약자로, 보통 미군 사병들이 부사관이 되기 직전에 받는 리더쉽 교육이다. 사실 9월에 가기로 했다가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10월로 미뤄졌다가 짬이 안된다는 이유로 1월로 미뤄졌다가, 다시 한달씩 밀려서 2월에 가게 되었다. 가는 것보다 준비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PLDC와 시니어 OJT를 이유로 5일정도 PT를 하지 않았지만, 시니어 카투사 OJT와 IMO잡과 PLDC준비를 같이 하다보니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몸살로 드러눕기도 했다. 패킹 리스트의 물품도 너무 많고, 수퍼바이저가 착하긴 한데 게으른 면이 있어 잘 신경써주지 않아 패킷도 금방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PLDC 입소 첫날 4시에 일어나서 캠프 잭슨으로 향했다. 입대할 때처럼 긴장했는지 전날 한 시간밖에 자지 못해 몽롱한 상태로 캠프 잭슨에 도착했다. 도착 후 여섯시에 첫 포메이션을 가졌다. 그때부터 교관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조그만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체중 체크를 하고, 패킷 검사를 한 뒤에, 패킹 리스트 검사를 했다. 이 패킹 리스트 검사는 엄격하다. 물품 체크를 빨리 하는데 짐을 쌀때 잘 정돈이 안되어 있었다면 고생좀 할 것이다. 체크하는 물품이 워낙 많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져간 짐의 양은, 더플백 두개, 양복 한벌, 가득 채운 런드리 백, 가득찬 록색 하나였다. 패킹 리스트 검사가 끝나면, 지정된 방에 짐을 푼다. 나는 짐 정리를 효율적으로 하지 못해서 두번 왔다 갔다 하는 덕분에, 가장 안좋은 자리인 이층침대의 위쪽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곳이 불편한 이유는 매일 아침 침구를 깔끔하게 정리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층침대의 윗층이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짐 정리를 하고, 뭔가 정신없이 첫날을 보냈다. 첫날에는 많이 후회했다. 왜 편한 용산 생활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고생을 하는가? 라고..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PLDC 첫날부터 파이어 가드, CQ등의 디테일이 시작된다. 첫날에는 피곤하기도 하고 잠잘 시간도 없으니 잠이 잘 올것이다. 한 3-4시간 정도 잤나? 둘째날에는 피티 테스트를 보았다. 피엘디씨의 피티 테스트는 push-up을 잘 안 세주기로 악명이 높다. 사실 그 악명 처럼 잘 안 세주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자대에서의 피티 때 보다는 엄격한 규정을 적용한다. 우리 중대에서는 나와 미군 두명 이렇게 세명이 들어왔는데, 그 두명이 피티 시험에서 떨어져서 다시 부대로 쫓겨나게 되었다. 나도 그리 좋은 점수를 얻진 못했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통과했다. 피티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분위기를 약간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 뒤로 강의실에서 여러가지 교육을 받았는데, 리더쉽, 미군 규정, NCO의 역사등 여러가지 것들을 배웠다. 강의가 주인 처음 2주는 잠과의 전쟁이었다. 수면시간이 부족하고(나중에는 점점 늘어나지만 쉐이밍하지 않는다면 평균 4-5시간 정도), 일과시간 중 정해진 수면시간 이외에는 쉬는시간에도 잠을 자는게 허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수업사이의 10분의 쉬는시간조차…) 잠을 참기 위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블랙 커피를 하루에 다섯잔 이상 마셨다. 덕분에 항상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시험은 오픈북으로, 강의시간에 필기한 것을 중심으로 나오게 된다. 따라서 강의시간의 필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총 세번의 시험이 있었는데, 첫번째, 두번째는 40문제, 세번째는 20문제가 출제된다. 난이도가 1,2,3순으로 낮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였던 것 같다. 2주정도는 그렇게 수업 위주로 진행되다가 3주째가 되면 필드에서 하는 교육이 주가 된다. Terrain Feature와 Land Navigation, STX등이다. 랜드 네비게이션은 4개의 지점을 주고 지도와 나침반, Protractor를 가지고 그 네 지점을 찾는 시험이었다. 세개 지점은 쉽게 찾았으나 네번째 지점을 찾는 도중에 길을 잘못 찾는 바람에, 도봉산 250m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도중에 길을 잃어서 당황하기도 했다(내려오던 도중 기도원과 마을까지 나왔다;;). 하지만 다시 침착하게 처음 지점으로 내려와서 다시 시도했다. 시간때문에 돌아갈까 했지만,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다 하고 계속 오르막길을 오르다 결국 오렌지색 좌표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수통에 있는 물을 있는대로 다 마시고 한 10분쯤 쉬다가 다시 캠프로 돌아왔다. PLDC코스중에서는 STX가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30시간의 훈련이지만, 나름대로 꽤 빡빡하게 짜여져 있다. 나한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거운 군장이었다. 꽉 찬 군장에 슬리핑 백 3종세트와 MRE 3개, 맙 수츠, 기타 여러 물품 등등. 처음에는 요령없이 혼자 일어나는 게 힘들 정도다. 훈련 시작 전 마일즈기어와 100발의 공포탄이 지급되었다. 100발을 언제쏘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Semi모드가 아닌 Burst로 마구마구 갈기다 보니 금방 떨어졌다. 6개의 미션과 나머지 시간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경계를 섰다. 미션은 NBC 하나와 영역 방어, 지점 공격 등이 있었는데 이게 만약 실탄을 가지고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순간 아찔해졌다. 다행히 대부분의 상황에서 대열의 뒤편에 있어서 6개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한번도 총을 맞은 적은 없었지만, 아직도 미군들이 공포탄을 맞았을때 나는 “지잉” 하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첫날 2개정도의 미션을 하고 돌아와서 경계를 서다가 Night Landnavigation(야간 독도법)을 한다. Land Navigation PLDC Dinning In에서 애국가 제창 중인 카투사들
평가과목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교관들이 열심히 할 것을 강요하기 때문에 지점을 잘 못찾으면 두시간동안 고생 많이 할 것이다. 우리 팀도 많이 헤매서 길도 많이 잃었다. 지점을 찾으면서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멋진 서울 야경을 즐겼던 생각이 난다. 겨울이 끝날 무렵이라 쌓인 눈은 반쯤 녹은 상황에다가 밤이라 달빛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농담이 아니라 세시간 동안 스무번 가까이 넘어진 것 같다. 넘어져서 Flashlight도 잃어버렸다. 네비게이션이 끝나고 덜덜 떨면서 경계를 서다가 11시 30분쯤에 취침에 들어갔다. 30분정도 자다가 교관이 누군가 총 관리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깨워서 단체 얼차려를 주고(양손으로 총들고 있으면서도 잤다.) 12시경에 다시 잤다가 2시 반에 다시 일어나서 야간 패트롤을 돌려고 하다 앞조가 늦는 바람에 우리 것도 앞조가 서게 되었다. 덕분에 한시간 더 잘 수 있었다. 3시 반에 기상해서 세면하고 MRE를 먹었다. STX에서 MRE의 소중함을 느꼈다. STX직전에 MRE가 3개가 지급되는데, 나는 언제나 꺼내 먹을 수 있도록 군장 위쪽에 달아놓고 다니다가 하나를 잃어버렸다. 체력소비도 많은데 얼마나 배고팠는지 모른다. STX가 끝나고 기쁜 마음으로 샤워를 하는데 손이 다 트고, 무릎과 어깨가 멍투성이가 되어서 놀랐다. STX가 끝나고 나면 이제 졸업날이 슬슬 기다려진다. 그 후에는 본격적인 Dinning In 준비가 시작된다. Dinning In Committee에 속한 사람들은 여유가 없을 것이다. 나는 애국가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매일 모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PLDC 다이닝 인은 캠프 스탠리에 있는 레지스에서 하게 된다. 다이닝 인을 하러 10분 거리인 캠프 스탠리로 이동하는 것일 뿐인데도 잭슨을 나간다는 생각에 다들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인상 깊었던 것 중에 하나가 캔틴 컵을 들고 가서, 일종의 폭탄주를 커다란 Bowl에 만들어서 나누어 먹는 행사였다. Bowl에는 막걸리, 레드와인, 소주, 보드카, 그린 쥬스, 사케 등 다양한 술이 들어간다. 식사는, beef, chicken, shrimp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디팩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shrimp가 그중 조금 특이하긴 한데, 느끼해서 새우만 다 먹고 파스타 종류는 반밖에 먹지 못했다. 다이닝 인이 끝나면 정말 거의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것은 졸업식 리허설 뿐이었다. 졸업식 리허설을 거의 8시간 이상 하니까, 많이 지루한 면은 있었다. 자랑스럽게도 수석인 Distinguished Honor Graduate는 카투사가 차지했다. 연습중 항상 처음에 호명되는 입상자들과 Commodant List에 든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졸업식 때는 의무사 사령관인 Allgood대령과 주임원사인 alcantara, 일등상사와 MSG Carr, SSG Wright, 선임병장님, SGT Roe, 박XX 상병님이 와 주었다. Jackson을 떠나는 그 기분은 마치 논산이나 KTA를 떠날 때와 같이 너무 좋았다. 끝나면 기본적으로 4 day pass가 지급된다. AREA I이라면 한국군 측에서 나오는 휴가도 기대해 볼 수 있겠지만 AREA II라면 그냥 4day하나로 끝이다.
ALLGOOD 대령과 전임 Senior KATUSA 김병장님
PLDC가 끝난 그 당일, 돌아오니 Brewer가 다음 날 한국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다고 했다. 미군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을 많이 연 녀석이었다. 마지막으로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선물로 카투사에게 지금되는 새 러닝슈즈(급해서 ^^;;)를 주고 다음날 작별인사를 했다. 녀석이 가 버리다니, 너무 아쉬웠다.
친했던 미군들
카투사 생활을 하다보면 다양한 Detail(잡역)을 하게 된다. Post-Police, CQ, CP, RAM, Base Defense등 그 종류만 해도 다양하다. 나는 앞의 세가지를 해 봤었는데, 포스트 폴리스는 일종의 부대 청소다. 하루종일 차를 타고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도로나 일정 지역에 차가 보이면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는 일이다. 이건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면 고역이다. CQ는 Charge of Quarter의 약자로, 한국말로 하면 일직과 같은 것이다. 막사 사무실에서 24시간 근무를 선다. 일이 없으면 공부를 하거나 TV를 볼수도 있어 나쁘지는 않은 Detail이다. CP는 Courtesy Patrol의 약자로 이태원 클럽에 있는 미군들을 단속하는 일을 한다. 밤의 이태원 클럽거리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훨씬 많다. 미군들이 난동은 안 부리는지, 혹은 복귀시간 이후까지 클럽에서 남아있는지 체크하는 역할을 한다. 이태원을 처음 가본 나는 무척 놀랐고, 씁쓸하기도 했다. 외국인들로 가득찬 거리, 술에 취한 미군들과 그들에게 안겨있는 내 나이 또래의 대담한 한국 여자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카투사 생활을 하면 보드를 빼 먹을 수 없다. 보드는 군사지식 경연대회인데 미군에 대한 규정지식에 관한 문제들이 출제된다. 보드에서 우승하면 KATUSA of the month라고 하여 4 day가 주어지고, Certificate of Achievement라는 상장이 하나 수여되고 한달간 중대 건물에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는 영광(?)을 얻게 된다. 나는 군 생활동안 세번인가 출전했는데 한번 KATUSA of the month가 될 수 있었다. 보드의 단계는, Month, Quarter, 여단급, Area, Year보드의 순서로 진행되게 된다(물론 각 보드에서 승리한 경우에). Year보드까지 승리해서 KATUSA of the Year가 되면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와 제주도 여행권, 휴가, 드래곤 힐 숙박권까지 준다고 한다. 1년에 4000명 정도의 카투사 중 1명만이 될 수 있는 영광된 자리이다. Senior KATUSA가 되고 나서는 Board Member가 되어 미군들과 카투사들에게 문제를 출제하는 출제 담당관의 역할도 해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문제 하나하나가 배점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PLDC가 끝나고 난 후 바로 Senior KATUSA가 되었다. 전 Senior KATUSA였던 김XX 병장님은 끝까지 잘 인수인계 해 주고 나가셨다. 인수인계를 잘 받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시작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산더미같이 일이 터졌다. 월, 화요일 이틀은 배럭 문제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전체 중대 카투사 인원이 현재 살고 있는 막사에서, 시설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막사으로 옮겨야 했던 것이다. 카투사 대표로 일등과도 이야기해보고, 주임원사와도 이야기해 보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시를 따르게 되었다. 선임병장 패치와 PLDC패치를 함께 달고 있으니, 더더욱 큰 책임감을 느꼈다.
확실히 PLDC를 다녀오고 Senior KATUSA를 달고 난 뒤에는, 몇몇 개념없는 미군들은 제외하고 지위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포메이션때는 Senior NCO 포지션인 포메이션 뒤에 항상 서 있었다. 선임병장이 될 사람은 PLDC를 다녀오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2005년 3월 말에는 EORC라는 클래스를 들었다 Equal Opportunity Representative Course의 약자로, 미군들은 주로 중대내 EO 대표가 되기 위해서 듣는 수업이다. 사실 Senior KATUSA는 코스를 듣지 않아도, 규정상 중대 내 카투사들의 EOR이 되지만, 규정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가 아닌 뭔가 체계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또한 PLDC에서 살짝 맛보기만 한 EORC가 과연 어떤 코스인가 궁금해서 신청하게 되었다. 교육은 AREA II의 EOA(Equal Opportunity Adviser)가 모두 나와 한번씩 돌아가며 진행한다. 교육은 이론 위주라기보다는 토론과 커뮤니케이션 기술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루에 열시간짜리 이론수업과 2분 혹은 5분의 쉬는시간에 적응하려니 지루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토론을 지켜보고 참여하면서 미국의 힘의 일부는 토론문화의 결과물이라는 생각도 했다.
EORC동안 두개의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하나는 Cultural Block 프리젠테이션과 하나는 Information Briefing이었다. 그룹 프리젠테이션에서는 Hispanic Language를, info Briefing은 age discrimination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코스를 수강한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그것보다 미군들 앞에서 직접 영어로 두개의 프리젠테이션을 해 보았다는 경험이 값진 것 같다.
EO Presentation 중
EO클래스를 듣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카투사위크, Virtue Program, 배럭 문제 등등이 일어나서 2주동안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았다. EO클래스가 끝나면 사무실에 가서 NCOIC와 이야기하고 일하고 9시에 돌아와서 그날의 과제와 내 할일을 하고 자면 2시가 넘었다. 명목상 여단대표 Senior KATUSA다 보니 중대사이를 조율해야 하는 일은 다 나에게 넘어왔다. 신경쓰이는 일이 많아서 잠도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지 못하다보니, EO 졸업식이 끝난 다음 주말에는 14시간이상 자게 되었다.
이오클래스를 듣는 동안에 병장진급을 하게 되었다. 아직 상병이 된지도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병장이 되다니, 적어도 나에게는 기나긴 상병이라는 경험은 없는 것 같다. EO클래스가 끝나고 나서도 진통은 컸다. Senior KATUSA라는 잡이 쉽게 하려면, 정말 쉽게 할 수 있지만 어렵게 하려면 한도끝도 없이 힘든 것이 이 선임병장이 아닐까 한다. Virtues Program Coordinator도 하고, KATUSA US Friendship week도 다가오고 해서, 생각보다 정말 일도 많았고 트러블도 많았다. 특히 J상사, F하사, R병장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많았다. 나는 적을 만들기를 싫어하고, 다 같이 잘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상병 때까지는 모두 잘 지냈었는데, 이 위치에서는 모두의 친구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좋은 NCO였던 써전 로가 떠났다. 써전 로와도 추억이 많다. 적으로 가득한 IMO에서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미군 중에 한명이었다. 키는 멀대같이 큰데다 좀 험상궂게 생긴 데다가, 욕도 많이 하길래 이놈은 좀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천성은 착한 사람이었다. 항상 춘천이나 원주 등으로 TDY를 가면, 돌아올때 길을 헤매서 예정시간보다 3-4시간 늦게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도로 표지는 서울 타워. 그가 항상 운전했던 파란 포스트폴리스 느낌이 나는 트럭, 그동안 왼쪽, 오른쪽, 쭉(직진)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서 길을 물을때 항상 한글로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후임이었던 홍XX, 김XX 일병과 함께 춘천에 일하러 갔을때 소양댐 갔었던 일과 닭갈비를 먹었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항상 명동거리를 지날 때면, 운전에 집중 안하고 여자들을 쳐다보느라 정신없던 써전 로. 다른 미군이었다면 한 소리 했겠지만 결코 밉지는 않은 미군이었다.
4월의 DCSIM파티에서 제대하는 여러 선임들과 나에게 Plaque가 수여되었다. MSG Carr가 신경 써 준 것인데, 보통 플랙은 제대할 때 받는데 받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아직 제대가 6개월이나 남았었는데 받게 되어서 놀랍기도 하고 기뻤다.
2005학년도 봄 Virtus Program은 내가 책임자의 입장에서 참여해서 부담이 컸다. 미군이 혼자 오다가 서울시내 도로에서 길을 잃어서 내가 수업중 직접 뛰어나가서 찾아오기도 하고, 부족한 인원으로 진행하여 학교 담당자들에게서 아쉬운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해당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지난학기에 다시 꼭 찾아와달라고 해서 나와 약속했었는데, 어쨌든 난 그 약속을 지켰다. 올해는 여고와 한번 해보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약속도 있고, 사실 USO측에서 여고는 안된다고 못을 박는 바람에 못했다. 작년에도 가르쳤지만, 올해는 프로그램 Coordinator의 입장에서 참여하게 되어서 새로웠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Swain상병과 정병장과 함께
카투사 생활을 하면서 인재를 만났다. 인재는 내 중학 동창으로, 내가 카투사로 입대하기전 중학교 동창이자 대학동창인 창민이를 통해서 입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병 3호봉때였던가 디팩에서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다. 바로 옆 중대고 숙소도 근처라서 자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2번의 Virtues Program도 같이 했다. 여러가지로 많이 도와준 고마운 녀석이다.
병장이 되고 나서는 미군과의 관계가 뭔가 어색해졌다. 상병때까지만 해도 친하게 지내고, 집이 부산인지라 나갈 일이 없어 주말이 되면 같이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선임병장이 되고 나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무게를 잡다 보니 친했던 녀석들과도 서먹서먹해지고 말았다. 상병 초반까지 내 이름을 부르는 미군 일병이 있었는데 PLDC를 다녀오고 나서는 그러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계속하길래 한번은 화가 나서 “I’m not Lee. You gotta call me SGT Lee. Private!!!” 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뒤로는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고 피해 다녔다. 그런 것은 참 아쉬웠다.
카투사들이 느끼는 큰 문제중 하나는 계급과 권한의 불일치다. 카투사는 6개월마다 한번씩 진급을 하고 1년이면 미군의 부사관 계급에 해당하는 CPL(상병)이 되는데 3년 이상 되어도 병장 계급을 못다는 미군들이 적지 않으니, 일부의 미군을 제외하고는 카투사의 계급을 인정해 주지 않고 일개 사병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크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카투사 계급을 3계급으로 나누어서 이병, 일병, 병장으로 나누고 자동 진급 제도를 수정하여, 병장 진급시 미군들의 PLDC와 유사한 코스 수료를 통해 미군들에게 이 카투사도 이 부사관 코스를 수료했으니 NCO라는 어필을 하면 미군들도 납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군중에서도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은 많다. 섹션 NCOIC였던 MSG(상사) CARR는 카투사와 미군을 한점의 차별없이 평등하게 대했다. 일등상사였던 1SG Patterson은 자신에겐 엄격하고 하급자들에게는 관대했다. 미군인사과 NCOIC였던 MSG Williams는 정말 모범적인 NCO였다. 사병들을 motivate시킬 줄도 알며 아랫사람들의 말에 귀 귀울일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감동스러울 정도로 나를 존중해 주었다. Senior KATUSA 시절 Formation때 뒤에 서 있으면 항상 “SGT Lee, You got anything to put out?” 하며 Senior NCO대접을 해 주었고 섹션에 카투사 관련 문제가 있으면 관습적으로 NCOIC 재량으로 하는 문제도 꼭 내 동의를 얻고 나서 처리하고는 했다. 또한 디테일이 있으면 보통 NCOIC는 섹션내 사병을 시키기만 하고 자신은 다른 일을 하거나 쉐이밍하는데 불구하고, 바쁜일이 있더라도 최소한 몇분 몇십분이라도 자기 섹션 사병들과 같이 할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9월 말에 커미스키에서 페어웰 파티를 했다. 페어웰 파티는 보통 다른 캠프로 떠나는 사람이나, 제대 직전에 떠나는 사람을 위해 하는 파티로 나름대로 친했던 미군인 SSG Wright이 여러가지를 많이 준비했다. 보통 카투사들의 Farewell파티에는 미군들이 많이 오지 않는데, 이번에는 DCSPER와 COMMO등 여러 섹션의 참여로 다른 여느때보다 미군들이 많이 왔었다. 그날은 정말이지 감회가 새로웠다. 바로 반년전 전 선임병장이었던 김XX병장님의 Farewell을 이곳에서 했었다. Farewell comment를 할 때 “I’m about to cry”라고 우는 척 하며 장난으로 말했지만, 누가 감동적인 말 한마디 더했다면 정말이지 눈물 날 뻔했다. Farewell파티에서 Plaque와 ARCOM, MOVSM을 받았다. 상복은 많아서 그런지 제대준비할 때 정리하면서 세어보니 2년동안 ARCOM(Army Commendation Medal), AAM(Army Achievement Medal), MOVSM(Military Outstanding Volunteer Service Medal), COA(Certificate of Achievement – 7개)를 받았다.
사회에서 카투사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은, “군생활 되게 편하게 했구나. 영어 배워서 좋겠네.” 가 대부분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몇시간 설명해도 이해해 줄지 확신이 없어서 그만두고 만다. 나는 군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것이 쉬웠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의지와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카투사 생활을 한다면 자신이 이전에 어떤 경험을 해 왔든지 결코 쉽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다.
2년간의 카투사 복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좋은 경험이었다.
좋은 선후임들과 군생활을 함께 했고, 운이 좋았는지 부대에서 상도 많이 받았으며, 카투사로서 누릴 수 있는 PLDC다 EORC등의 교육혜택도 많이 누렸다. 여유시간에 영어, 일본어 공부 등 자기개발도 했고, 일반병으로 갔다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색다른 경험(?)까지 할 수 있었다. 물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만 나올 뿐이다. 내가 선택해서 온 곳이라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남자들에게 2년이라는 군생활은 정체하느냐 혹은 앞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중요한 시기인데, 나는 운 좋게도 두번째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